기쁨의 도시라 불리는 인도 최대의 도시 캘커타. 그러나 그 이면에는 4백만 명이 넘는 절대 극빈자가 지독한 가난과 싸우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곳에 맨손과 맨발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력거꾼 ‘샬림’이 있다. 아내의 병원비, 가족의 생활비를 벌면서 틈틈이 돈을 모으고 있는 샬림의 꿈은 하루 빨리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장만하는 것.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는 ‘인샬라’를 마음에 새기며 매일같이 지열 70도의 뜨거운 아스팔트, 세차게 몰아치는 빗줄기를 뚫고 꿈을 향해 맨발로 거리를 나선다. 그러나 아내의 병은 차도가 보이질 않고, 설상가상으로 학업을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뭄바이로 떠났던 큰 아들은 신종플루에 걸렸다는 연락을 받게 되는데…
※ 스포 주의
극이 시작하자마자 이 영화의 주인공, 아니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매우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는 상태로 등장한다. 늙고 추레한 외모의 이 초로의 인도 남성이 바로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극구 카메라를 밀어 내며 자기를 찍지 말라며 화를 낸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후 다큐멘터리는 관객이 던진 이런 물음에 답을 하듯 진행된다.
기쁨의 도시라 불리는 인도의 캘커타에서 맨발로 인력거를 모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샬림'이 바로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다. 샬림은 35년 전 고향을 떠나 캘커타에 와서 인력거를 모는 일을 해서 푼돈을 모아 다달이 집으로 생활비를 부쳐 왔다. 그가 보내준 돈으로 아내는 시골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먹여 키운다. 샬림과 같은 인력거꾼들은 대부분 지독한 가난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흘러 들어온 극빈자층이 대부분이다. 샬림의 큰아들뻘인 '마노즈' 역시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신참 인력거꾼이다. 다큐멘터리는 샬림과 마노즈와 같은 인력거꾼들이 서로를 다독이며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안에는 정도 있고 유머도 있다. 또한 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얻는 위안은 이들에게 큰 힘을 준다. 하지만 현실은 인력거를 몰아 버는 수입으로는 고향에 보낼 돈은 커녕, 자신마저 끼니를 거를 때가 허다할 만큼 비참하다. 또한 이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질병이나 사고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샬림 역시 적은 돈으로 대식구 살림을 꾸려 가던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가난 때문에 가출했던 큰 아들도 병에 걸려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럴 때마다 샬림은 인력거를 내려 놓고 가족들에게 달려 간다. 가난한 그에게 '가족'과 '꿈'은 같은 이름이면서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는 대상이다. 샬림은 가족을 위해 인력거를 몰았고 가족을 위해 삼륜차를 사고 싶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으나 결국 그 희망은 가족 때문에 무너지고 만다.
샬림은 다큐멘터리에서 총 두 번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 영화의 초반, 제작진에게 카메라를 치워 달라며, 당신들과 같은 외국인 친구들은 필요없다며 화를 내고, 또 영화의 중후반, 자신이 35년 동안 꿈을 위해 노력해 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조짐을 느끼고, 그간 꾹꾹 눌러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이렇게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인물이 극한 상황에 놓였을 때 다큐멘터리의 매체적 딜레마가 등장한다. 인물의 절망하는 순간을 담아야 하는 다큐멘터리의 숙명은 언제나 윤리적 물음에 맞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의 존재로 인해 인물이 더 심하게 받게 될 실질적인 고통과 상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카메라는 결국 샬림의 모습을 모두 카메라에 담아내었고 덕분에 관객은 샬림이 잠든 가족 옆에서 숨죽여 눈물을 훔치며 제작진에게 제발 카메라를 치워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되고야 말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나가 달라며 화내고 애원하는 샬림을 지켜보는 장면은 분명 마음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픈 마음'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멈칫 하는 순간 제작진이 카메라 안에 등장해 샬림을 안아주고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작진이 샬림을 진정시키는 데 쓴 말은 바로 '인샬라',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 '신의 뜻'은 샬림의 태생적 가난을 가리키는 것인가. 가족의 질병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샬림의 피치못할 선택을 뜻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불행을 낱낱이 담아 내고 있는 카메라의 존재를 말하는 것인가. 나의 '아픈 마음'은 동정심일까, 아니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은 아닐까.
나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다큐
극의 초반에서 제작진은 내레이션(이외수)을 통해 '우리는 샬림을 한 사람이 아닌 피사체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라는 반성 어린, 그러나 답이 없고 해결할 의지도 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샬림이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순간까지 지켜본 관객 모두에게 가책을 나누어 지도록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은 (샬림에게 있어) 잔인하다. 관객은 한 사람의 생을 스크린을 통해서 지켜보며 무력하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참담함을 느끼고 그의 상황에 우리의 현실을 빗대 난 그래도 '다행'이라는 잔인한 위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샬림의 아내는 여전히 입원 중이고 그의 생계 수단인 인력거는 빈곤의 상징으로 비판받으며 인도 정부에 의해 수년내 사라질 운명이라고 한다. 샬림과 그의 아내와 큰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신분제와 지주, 소작농 사이의 갈등 때문에 아버지가 학살된 수많은 '마노즈'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캘커타 거리를 오가는 배낭여행객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들의 불행을 한낱 구경거리와 교훈과 위안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다큐멘터리가 의의를 가지려면 수많은 사람들이 스크린을 통해 그들의 불행을 목도한 댓가로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도록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것은 다큐멘터리의 제작진이 고민해야 하는 몫이 아니다. 10년 전에 샬림을 만나 기획과 제작이 시작되었을 이 다큐멘터리는 관객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그 소임을 마쳤다. 물론 그들의 가난과 불행은 감상적으로 포장되었고 관객은 잘못 한 것 없이 샬림의 눈물 앞에서 죄의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반성해 보아야 할 지점은 이 다큐멘터리를 주목하는 이유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인 빈부 격차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이국적인 피사체와 풍경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할 뿐 절대 완벽할 순 없다. 냉소적으로 말해 카메라를 든 사람(제작진)은 그들의 불행을 전시하여 앞으로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샬림의 직업이 인력거꾼인 것처럼 카메라는 잔인하리만큼 적나라하게 샬림의 밑바닥 인생을 비추는 역할을 하였고 관객인 나는 연휴 중 어느 날 영화관 한 구석에 앉아 머나먼 나라의 밑바닥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돈을 주고 관람하였다. 이렇게 카메라는, 그리고 관객은 샬림을 가난에서 구제해 주거나 그의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
그.럼.에.도. 다큐멘터리는 존재해야 한다. 다큐멘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을 그 존재 이유로 갖는다. 카메라의 도구적 역할은 샬림과 같은 캘커타의 인력거꾼이라는 존재를 알리고 인도 정부의 모순과 무능을 지적하고 먼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현실을 직시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샬림과 10년 동안 친구였다고 '주장'하는 제작진은 과연 샬림의 불행과 슬픔을 어디까지 공감했을까 하고 궁금해 할 수도 있고 그들이나 관객의 감정이 단지 가슴아픔 이상의 감상일 수 있었을까 자책할 수도 있고 누구 하나 실질적으로 샬림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인가 자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샬림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앞으로 만들어낼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들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죄의식을 공유한 관객들이 스스로 변화하길, 그러한 변화가 모여 결국은 세상을 변화시키길 바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큐멘터의 의의는 관객들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들이 조금씩 생겨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남겨진 것은 이제 카메라가 아닌 관객들의 몫이다. 이것이 이 다큐멘터리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져야 하는 이유이다.
+ 이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은 이외수씨가 맡았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말투가 그들의 슬픔을 더욱 낭만화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외수'씨가 자체 발산하는 아우라 덕분에 상쇄되는 듯.
++ 샬림의 친구로 만나게 된 마노즈가 제작진의 카메라에 10년 전 찍힌 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은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제작진의 엄청난 자료 수집에 대한 노고와 작품에 대한 열정, 의지가 느껴졌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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