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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분석리뷰. 그들은 왜 헤어지고 어떻게 무너졌나

'헤어질 결심'을 하기까지
영화 <헤어질 결심>의 두 주인공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는 각각 한 번씩 서로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해일이 서래를 떠나고 후반부에서는 서래가 해준을 떠난다. 영화는 헤어지는 주체가 아니라 남겨진 사람을 비추는 방식으로 '결심'의 주체에 대한 그리움과 공허함을 극대화한다. 
 
전반부, 해준의 헤어짐.
해준이 서래와 헤어지려고 마음먹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게 말하면 그의 경찰로서의 자부심을 서래가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름대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다고 스스로 믿어왔던 그 세계를 서래가 '붕괴'시켰다고 말한다. 해준은 자신의 것을 무너뜨린 사랑이라는 존재에 대한 배신감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서래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후반부, 서래의 헤어짐. 
그와 달리 서래가 해준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이유는 해준으로부터 그의 사랑을 부인당해서였다. 서래가 '사랑한다는 말'이라고 믿었던 그 말을 해준은 기억하지 못했고 해준이 말했던 그 사랑고백처럼 들렸던 말은 왠지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다른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해준과 헤어지기 위해 처음 했던 시도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혼도 실패로 돌아가고 해준으로부터도 상처받은 서래는 결국 해준과 단호하게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극의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해준과 서래가 서로가 가진 공통점을 발견하고 공감하며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이 각자 헤어지기로 한 배경에는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해준이 서래를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단어는 바로 '붕괴'였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붕괴됐어요."라는 해준의 대사는 사랑하는 여자한테서 이용당했다는 걸 깨달은 후 배신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뒤섞인 말로 들렸다. 하지만 영화의 두 번째 헤어짐(결말)을 알고 난 후 다시 영화를 보고 나자 '붕괴'라는 단어는 사랑보다는 해준이 명예롭게 여기던 경찰이라는 직업으로부터 우러나오던 '자부심'이 상처를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우리는 최연소 경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해준이 얼마나 실력있고 열정적인 경찰이었으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는지를 영화 전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해준은 서래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로 꼽았던 '품위'라는 것이 바로 경찰로서의 자부심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사 바로 뒤에 나온 '붕괴'라는 단어는 던 사랑하는 남자로서의 의미보다는 명예롭고 강직한 경찰로서의 자부심이 무너져 내렸다고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그 자부심이라는 것은 서래에게도 있었다. 서래가 직접 '자부심'이라는 단어를 말한 적은 없지만 독립운동가였던 외할아버지의 훈장 수여식의 사진을 해준에게 보여줄 때 서래는 자부심에 가득차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니까요.'라고 말하는 서래의 눈은 흔들림없고 '꼿꼿'했다. 해준은 그녀의 그런 점이 좋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자부심은 해준의 것과 달리 그녀의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밀입국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한 외국인 여자에게 이국땅에서의 삶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녀의 자부심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그녀는 오래된 것들에 애정을 갖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노인들을 돌보고 사극을 보며 한국어를 연습하고 옛노래를 찾아서 듣는 걸 좋아하던 서래에게 '현대인치고는 품위있는' 해준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건 어쩌면 당연하다.
 

서래의 외증조부가 국가 훈장을 받는 사진을 보여주는 중. 둘이 처음 밀착되는 순간이기도 하고 서래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호미산에서 라이트로 해준의 얼굴을 비췄던 것처럼 이 장면에서도 후광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그에 비해 서래의 두 남편과 해준의 아내 정안은 품위와는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는 듯한 인물들이었다. 정복욕, 소유욕이 강하고 폭력을 일삼던 서래의 첫 남편, 그리고 몸만들기에 집착하며 맞춤법을 틀리기 일쑤인 두 번째 남편. 여성의 폐경을 늦추는 석류, 남성 호르몬에 좋다는 자라 등 원초적 식재료에 집착하는 해준의 아내가 그렇다. 영화 속에서 주로 먹거나 먹을 것을 다듬고 섹스를 하는 해준의 아내 정안과 달리 서래는 해준의 자부심의 원천인 직업 세계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그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준다. 이것은 서래가 해준의 '품위'를 이해하고 그것을 마음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해준 역시 서래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녀의 흡연 습관을 이해하며 그녀를 위해 중국 전통 음식을 만들어주는 등 서래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상대방의 품위를 존중해줄 줄 아는 삶의 태도가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엇갈림의 시작
이렇게 해준과 서래는 모두 자부심을 가진 꼿꼿한 인물이었고 해준은 서래가 자신과 '같은 종족인걸 알았다'고 할만큼 동질감을 느낀다. 실제로 둘은 처음 만난 날에도 부부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팀웍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품위와 자부심의 근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는 자연스럽게도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해준은 사건 현장에서 무언가를 또렷하게 보고 싶을 때 눈에 안약을 넣는다. 명확한 증거와 판단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습관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래는 그 자체로 '안개'와도 같은 모호함 투성이의 여자였다. 살인을 했는지 남편을 죽였는지 온통 수수께끼로 둘러싸인 서래는 해준의 질문에 대답을 명확한 대답을 하기보다는 자꾸만 다른 단서를 던지며 해준을 이끌어가곤 했다. 서래는 해준의 안약을 무용하게 만드는 '안개' 그 자체였다. 안개 낀 바다가 좋다고 말하던 해준은 그녀의 범행을 확신하게 된 후 스스로 안개를 걷고 그녀를 떠난다. 그녀의 행적을 입증할 단서인 월요일 할머니의 핸드폰을 바닷속에 멀리 던져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남긴 채. 
 


그러나 해준이 남긴 마지막 말을 녹음한 서래에게 그 음성은 사랑을 고백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이 갖고 있다는 음성파일이 어떤 내용이냐고 묻는 해준에게 서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라고 답한다. 당연하게도 서래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적이 없는 해준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고 따지는 해준의 목소리를 전해듣고 서래는 결국 그의 사랑이 어쩌면 자기 착각이었을지 모른다는 오해를 하게 되고 이 오해는 그녀가 해준과 영영 헤어지기로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분명 그녀는 헤어지기 전 해준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을 고백하고 그의 마음을 확인한 적이 있다. 외증조부와 모친의 유골을 해준에게 뿌려달라고 부탁했던 호미산에서였다. 이 씬은 서래가 붙잡고 있던 과거의 모든 것과 제대로 된 이별을 하고 해준의 자부심을 회복할 기회를 주는 등 서래의 모든 욕망이 해소되는 중요한 씬이다. 서래는 외할아버지와 모친에게 해준을 '믿음직한 남자'라고 소개하며 인사를 고한다. 그리고 해준이 버리라고 했던 핸드폰을 돌려주며 예전 사건을 재수사하고 '붕괴하기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어쩌면 자신이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말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품위'를 잃어버린 해준에게 그것을 되찾게 해주고 싶었던 서래의 진심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그녀는 그동안 해준이 내뱉은 '붕괴'라는 두 글자가 얼마나 사무치게 아팠을까. 이 씬에서 서래는 해준의 얼굴을 강하게 비추는 랜턴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건 마치 두 사람의 관계를 이끌고 싶은, 해준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서래의 의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해준은 이런 서래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대신 '경찰과 피의자' 관계라는 사실만을 재확인시킨다. 서래는 그런 그에게 키스하고 곧 씬은 전환된다. 
 


 
이렇게 두 사람의 자부심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두 사람의 결말을 다르게 가져오는 매개가 된다. 그렇다면 둘 중 누구의 자부심이 진짜였을까, 아니 진실했을까. 해준은 서래를 사랑했지만 깊은 내면에서는 안전한 사회적 제도에 안착한 '남편'으로서의 정체성과 존경받는 직업인으로서의 위치를 더욱 중요시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서래를 사랑하면서도 주말마다 아내에게 달려가 남편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그는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서래의 존재를 부정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서래에 대한 생각을 하던 중에도 '중국인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인이 불쌍'하다고 반대로 이야기하는가 하면 서래가 좋아하는 노래 '안개'를 들으면서 아내 앞에서는 '구닥다리 노래'라고 폄하하거나 서래의 담배냄새 때문에 아내가 오해하자 '수완 때문에 폐병걸릴 것 같다'며 둘러내고 상황을 모면하는 식이다. 그는 서래를 사랑하지만 서래를 갖기 위해 안전한 가정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보인다. (영화가 그의 아내인 정안을 가장 처음 소개하는 장면 속 신문기사의 제목은 '원전 완전 안전'이다. 또 해준은 아내가 이주임과 집을 떠날 때에도 외도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섹스'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될 것인지부터 묻는다. 그에게 가정은 사랑보다는 안정감을 주는 공간성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정말 해준이 원했던 것은 모호한 사랑이 아니라 그저 '살인'과 '폭력' 사건이 꾸준히 일어나는 일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포에서의 경찰생활은 그에게 무력하고 피로한 것이었다. 그는 서래에게 '피비린내나는 현장'이 무섭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포에서 일어난 첫 살인사건 소식을 아내가 전해줄 때 그는 커다란 날생선을 맨손으로 손질하던 중이라 손에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서래는 피냄새를 싫어하는 해준을 떠올리며 두 번째 남편인 임호신이 빠져죽은 수영장의 핏물을 빼고 시신의 피를 씻어내는 수고를 감행하지만 그 현장에 처음 나타난 해준은 오랜만에 살인사건 현장에 왔다는 설렘으로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는다. 영화에서 아내와 함께 해준이 석류를 다듬고 있는 장면에서 정안은 "당신은 살인과 폭력이 있는 곳에서만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직후 이어지는 컷은 서래가 철썩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렇게 서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준이 기다리던 폭력과 살인사건을 가져옴으로써 해준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관객은 서래의 행복과 해준의 행복은 절대 양립할 수 없음을 은연중에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서래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친절한 형사의 심장', 혹은 '믿을 만한 남자'? 그녀의 대사들을 들어보면 한국에서 믿음직한 남자와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사랑받으며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로서의 꿈이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살인사건 용의자 신분으로 밀입국한 여성이라는 그녀의 정체성은 애초에 그녀가 '안식'에 머무를 수 없는 조건이라는 전제를 명확히 한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위치에 있었다. 병든 엄마를 보내주고 몸이 아픈 노인들을 돌보고, '이렇게 죽어도 좋다'는 기도수에게(기도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해준의 상상대로 서래가 기도수를 구도산 정상에서 밀어 살해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마저 기도수가 원하는 죽음의 방식이었을 것이고 서래는 그의 자살을 도왔을 가능성이 높다.), 철썩의 엄마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안식을 주었으며 사랑하는 남자 해준에게는 편안한 잠을 가져다 주었다.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한 그녀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먼저 해준이 그녀를 떠나고 난 후 남겨진 거실에서 그녀의 시선이 유골함(그 안에 들어있던 펜타닐)을 향하고 있었던 장면에서 관객은 이미 그녀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외할아버지와 엄마의 유골을 늘 집에 보관하고 그 안에 언제든 죽음을 가져올 수 있는 약을 숨기고 있는 그녀에게 죽음은 슬프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해준이 남긴 음성녹음 중 '바다에 던져요. 아무도 찾지 못하게.'라는 말이 마치 자신과의 사랑을 부인하고 덮어두고 싶은 해준의 진심으로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바다에 던짐으로써 해준의 '자부심'이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해준이 바닷속에 던지라고 한 그 폰은 월요일 할머니가 '시리'에게 노래를 틀어달라고 자주 호명하던 물건이다. 할머니가 시리를 부르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몇 번 반복되는데 뒤로 갈수록 모호하게 들려 마지막엔 '시래', '서래'라고 부르는 듯 들리기도 한다. 해준이 버리라고 한 것은 핸드폰과 서래 둘 다였는지 모른다.) 
 
영화는 그녀의 죽음을 눈물을 유도할 목적으로 진열하지 않는다. 그녀가 죽은 까마귀를 묻어줄 때 사용했던 양동이로 자신의 무덤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그녀의 표정과 속마음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다. 그녀의 죽음마저 끝까지 덤덤했고 그녀는 '죽었다'는 느낌보다는 어쩐지 홀연히 사라진 느낌이다. 오히려 우리가 오랫동안 목도해야 하는 것은 사라진 서래를 바닷가에서 애타게 찾아헤매는 해준의 모습이었다. 지난 오해와 오만, 의심과 불필요한 확신 등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를 깨닫는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지나고 해준은 다시 한번 자신의 음성을 곱씹는다. '바다에 던져요. 아무도 찾지 못하게.' 결국 서래가 얼마나 자신의 모든 말 한 마디 한마디를 믿고 아꼈는지, 그에 비해 자신은 얼마나 오만하고 무디었던 건지 깨달은 걸까. 그는 운동화 끈을 고쳐묶는다. 그리고 다시 서래 이름을 부르며 안개가 자욱해진 어두운 바닷가를 오래도록 헤맨다. 
 

송서래에 대해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술을 마실 때 회식 자리에 홀로 앉아있는 방 벽에 걸려있는 그림은 송서래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바닷가 풍경을 담고 있다.

 


 
산(흙)과 바다(물)
영화는 산과 바다의 이미지를 대조적으로 이용한다. 영화의 타이틀이 나오고 난 직후에 이어지는 씬은 서래의 첫 번째 남편이 죽은 구도산이다. 해준은 수완을 뒤에 매달고 기름봉 정상에 오르는데 그가 오르는 동선을 보여주는 씬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주로 사건의 뒤를 쫓으며 계단, 오르막길을 숱하고 오르고 두 명의 범인을 제압하는 장면 모두 높은 지대에 위치한 건물의 옥상들에서 벌어진다. 해준은 모든 것이 명료한, 올라가면 답이 있는 산이나 높은 곳에서 유난히 유능해 보인다. 자기 확신에 따라 수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성격, 최연소 경감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들이 높은 곳에서 빛을 발한다는 설정은 앞서 이야기했던 그의 자부심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가 누리는 사회적 제도와 안정된 직업이 주는 안정감은 분명 서래와 같은 변방의 인물이 자연스럽게 누리기 어려운 위치에 있고 서래가 '높은 데'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들이다.(해준의 상상 속이 아닌 현실에서 서래가 실제로 높은 곳에 올라간 장면은 자신의 자부심의 상징이었던 '호미산'이 유일하다.) 어쩌면 해준은 서래처럼 바다를 좋아했을지언정 스스로는 산에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서래는 그 자체로 '물'과 같은 존재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석구석에서 물의 이미지를 시각화한다. 영화 전반을 감도는 푸른 빛이 그렇고 서래의 방 벽지 무늬, 서래가 즐겨입는 옷의 컬러감 등이 그렇다. 해준을 처음 만났을 때 서래는 푸른색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두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순간에는 녹색인지 파란색인지 모호한 컬러감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영화 초반 해준이 아내 정안과 관계하던 중에 목격한 벽에 핀 곰팡이는 '서래'라는 '물'의 습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물론 그 물은 처음에는 해준을 잠들게 해주는 안식처이기도 했고 서래와 해준이 데이트할 때 두 사람을 적시던 낭만적인 비이기도 했다. 호미산에서는 눈이 되어 내리기도 했다. 서래는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고 죽음과 이생을 넘나드는 데 이질감이 없는 존재였고 두 사람의 유일한 데이트 장소였던 사찰은 해준이 서래를 따라 그녀의 세계에 직접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유적지 사이를 거닐다 에어팟으로 함께 녹음 음성을 듣는 장면은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 등 최신 디바이스의 기능을 다양하게 이용하던 두 인물이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 서 있는 '단일한' 연인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래와 해준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공간은 현대 사회를 규정하는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서래는 극중에서 아이스크림을 식사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른의 기호품인 담배를 즐기는 양가적인 모습을 보인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세트는 물과 흙의 색상을 영화 전반에 활용한다.
산인지 바다인지 모호한 서래의 집 벽지에 비해 해준의 집 벽지의 잘 짜여진 격자무늬는 빈틈을 보이기 싫어하는 꼿꼿한 해준의 성품을 말해준다. 관객이 벽지에 주목해야 하는 순간 서래는 붉고 화려한 톤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우는 서래에게 건네는 해준의 손수건도 격자무늬

 
두 번의 붕괴
그렇다면 해준이라는 '산'은 어떻게 '바다'에 의해 무너졌을까. 해준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한 '붕괴'라는 단어는 서래가 떠난 바닷가에서 명확히 구현된다. 서래가 들어가 앉은 모래 구덩이 바로 옆에는 그녀가 양동이로 퍼낸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모래성이 남아 있었다. 처음에 이 모래성은 화면을 한가득 채워 파도를 다 가릴 만큼 거대하게 보여진다. 어쩌면 해준이 이 모래성을 발견한다면 서래를 구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갖게도 된다. 하지만 점점 거세어지는 파도 앞에서 모래성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끝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붕.괴'. 해준의 첫 번째 무너짐이 경찰로서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느낀 그 순간이었다면 그의 두 번째 진짜 붕괴는 바로 모래성으로 시각화된 '서래를 잡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그녀를 떠나보낸 그 시점이었다. 결국 해준은 두 번 붕괴했고 이렇게 바다는 산을 무너뜨렸다.
 

서래의 머리 위로 보이는 비행기가 해준의 머리 위를 지나간다. 해준에게는 서래를 구해낼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


영화는 어쩌면 해준이 처음부터 서래를 품을 능력이 안되는 인물이었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풍긴다. 영화의 초반 서래의 집앞에서 잠복을 하던 해준은 어느새 그녀의 바로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관찰하고 말을 걸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던 그가 서래를 처음으로 오해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담배를 손에 든 채 몸을 숙이고 있는 서래를 보고 해준은 '우는구나, 마침내.'라고 말하며 서래의 옆에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눕는다.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상식적인 아내의 모습을 확인함으로써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또 하나 확보되었다는 듯 편안하게 잠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때 사실 서래는 웃고 있었다. 해준은 서래를 관찰했지만 사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서래가 정말 눈물을 흘린 것은 해준이 떠났을 때였다. 그리고 '마침내' 울게 되는 것은 서래가 아닌 해준이었다. 무언가 명료하게 보고 싶을 때마다 눈에 안약을 넣어 마치 우는 얼굴처럼 보이던 그가 결국 서래를 잃고 나서 울게 된다. 
 


 
한편 산과 물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산과 바다 모두 한편으론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서래의 첫 번째 남편 기도수는 일상(더러운 세상)을 벗어나 산에 오르는 행위를 통해 위안을 얻었고 서래는 냉동화물선을 타고 바다를 떠돌다 한국에 밀입국해 정착했다. 해준은 바다로 들어가가 해파리가 되는 상상 속에서 잠에 들었고 서래는 외조부와 모친의 뼈를 산 위에서 뿌렸다. 그러나 산과 바다는 안식과 동시에 그와 동일시 되는 죽음 또한 품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많은 죽음이 산과 바다에서 일어났고 또 무언가 버려지거나 감춰지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는 산과 바다의 양가적인 이미지를 '안개'의 습성으로 귀결한다. 시야를 가려 진실과 정의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드는,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안개. 영화의 주요 공간적 배경인 이포의 상징이 바로 '안개'이며 서래가 좋아하는 노래로 설정되어 영화 속에서 반복해 흘러나오는 '안개'(1967년, 정훈희 데뷔곡)는 서래의 캐릭터를 더욱 신비롭고 아련한 이미지로 만드는데 일조하면서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서래의 감성으로 천천히 채워간다. 모든 관객이 물에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서서히 슬픔에 젖어가도록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안개'라는 노래가 지닌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터다.
 
 
 
누군가의 '시선'
영화에는 유독 '시선'이 부각되는 앵글이 자주 등장한다. 해준은 서래에게 살인현장에서 만나는 시신의 마지막 시선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죽은 자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카메라는 죽은 자들의 시선으로 남아있는 자들을 바라봄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죽은 자들이 남기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가늠해보게끔 유도한다. 기도수가 떨어져 눈을 벌린 채 기름봉 꼭대기에 있는 해준/ 서래를 바라보는 시선,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홍산오가 해준을 올려다보는 시선, 그리고 아마도 모래에 파묻힌 서래의 시선이었을 해준을 올려다보는 시선. 또 서래의 외할아버지와 엄마의 유골함이 서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 정안이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던 죽은 생선의 시선까지.
 

a. 해준에게 호감을 느끼던 서래의 시선
b. 유골함에서 서래를 바라보는 죽은 자들의 시선. 이 두 장면의 시선은어딘가 닮아 있다.
이것은 서래의 시선이었을까

 
서래에게 시선의 중요성을 말하던 해준은 정작 자신이 지녀야 할 올바른 시선, 판단력 앞에서는  냉정해지지도 솔직하지도 못했다. 시선의 주체가 가진 의도나 확신에 따라 얼마나 대상이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우리'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영화에는 '우리'라는 표현에 대한 의구심, 거부감이 여러 번 등장한다. 등장인물이 '우리'라고 할 때 상대방의 대부분은 '우리?'라고 되묻는다. 발화의 주체와 같은 상황, 상태, 감정으로 엮이는 것이 타당한가 의문을 갖는 상대방의 반응이다. 과연 너와 내가 '우리'로 묶여 함께 호명될 수 있는가. 편의에 따라 당신과 내가 같은 존재라고 이름지어 버리는 '우리'가 과연 자연스러운가. 그것은 당신의 의지인가, 아니면 당신의 착각인가.
 
결국 진정한 '우리'가 되는 데 실패한 서래는 해준의 미결사건으로 남기로 한다. 서래는 해준의영화는 사랑에 마주하는 사람의 태도와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비극을 보여준다. 비극은 마치 물에 잉크를 탄 것처럼 서서히 진행되고 붕괴는 그야말로 한 순간에 찾아온다는 것을.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마침내 서래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해준이 원하는 방식으로 '운명'했다. '참 불쌍한 여자네.'라는 스스로의 자조처럼. 
 

 

헤어질 결심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와 마주하게 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남편의 죽음 앞에서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는 `서래`. 경찰은 보통의 유가족과는 다른 `서래`를 용의선상에 올린다. `해준`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 탐문과 신문,잠복수사를 통해 `서래`를 알아가면서그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낀다.한편, 좀처럼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서래`는상대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준`을 대하는데….진심을 숨기는 용의자용의자에게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는 형사그들의 <헤어질 결심>
평점
7.8 (2022.06.29 개봉)
감독
박찬욱
출연
박해일, 탕웨이, 이정현, 고경표, 김신영, 정영숙, 유승목, 서현우, 정이서, 이학주, 박용우, 박정민, 유태오, 정소리, 황재원, 신안진, 김도연, 고민시, 차서원, 주인영, 손관호, 정혁, 윤성원, 최선자, 진용욱, 안진상, 정하담, 최대훈, 김미화, 곽은진, 안성봉, 김성곤, 문순주, 현직, 한서울, 김도담, 문정대, 유인혜, 권혁, 유덕보, 이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