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2006년, 뭄베이. 빈민가 출신의 18살 고아 자말은 거액의 상금이 걸려있는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최고 인기 퀴즈쇼에 참가한다. 처음 모두에게 무시당하던 자말은 예상을 깨고 최종 라운드에 오르게 되고,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의 부정행위를 의심한 경찰은 자말을 사기죄로 체포한다. 하지만, 결국 자말이 살아온 모든 순간이 정답을 맞출 수 있는 실마리였다는 것과, 그가 퀴즈쇼에 출연한 진짜 목적이 밝혀지게 되는데…

이 영화 처음부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질문. 자말 말릭은 퀴즈쇼에서 상금 6억원이 걸려있는 최종 단계에 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보기. A: 속임수를 썼다. / B: 운이 좋았다. / C: 천재이다. / D: 그렇게 될 운명이다.

자, 정답이 무얼까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다.
감독이 이끄는대로 정신없이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정답은 툭 튀어나온다.
절대 고민하면서 볼 필요가 없는 영화라는 뜻이다.
내가 이 영화를 기대했던 이유는?
A. 아카데미 최다 수상작품이라서
B. 대니 보일 감독 연출이라서
이 두 가지.
대니 보일 감독 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트레인스포팅>보다는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이었다.
이완 맥그리거와 당시 외모의 전성기였던 카메론 디아즈가 커플로 출연했던 이 영화는
기발하고 뒷통수치는 유머 감각, 그리고 화려한 화면과 음악 때문에 나를 황홀하게 했었다.
(홀리 헌터가 푼수끼있는 천사로 나오는.. 관심있다면 한번 보시길.)
그때 그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스토리를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는 거였다.
주인공 성격이 워낙 다혈질인데다가 <죽어도 해피엔딩> 식의 반전과 반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성이어서...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명장면, 이완 맥그리거가 'Beyond the Sea'를 부르는 뮤지컬 씬.
이렇게 대니 보일의 영화는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박진감을 주기 때문에 무척 좋아했더랬다.
(이후 <28일 후>를 보고 갸우뚱 하고 나서 <선샤인>은 아직 보지도 않았지만)

여기서도 '두 명의 아해가 질주하오.'

아, 그래서 이 영화도 역시
인도 전통 음악과 현대음악이 어우러져 시종일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데 한 몫 한다.
스토리 전개 역시 퀴즈쇼가 벌어지고 있는 스튜디오와 경찰의 심문을 받고 있는 현재의 장소,
그리고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재연하는 세 시간대의 씬이 정신없이 번갈아 보여지며 지루할 틈을 없앤다.
지금까지 인도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이 영화는 단지 배경만 인도일 뿐이지, 연출이나 구성 모든 것은 할리우드의 그것을 그대로 빼닮았다.
영국의 방황하는 청춘들이 질주하던 것처럼
영화는 시작부터 인도의 빈민촌을 정신없이 누비며 도망다니는 인도 꼬마들을 비춘다.
그 꼬마들이 지나치는 골목골목에서 보여지는 인도의 풍경들은
사실 꾀죄죄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너무나 밝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표정과 신나는 음악은
그것을 한바탕 유희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이 시각적 역동성 안에 인도의 모든 것이 비친다.
빈민가의 풍경, 뛰어놀 곳이 마땅치 않은 아이들, 비좁은 학교, 질서없는 시장 거리,
위에서 내려다 본 판잣집의 지붕들처럼 갑갑한 현실에서도 아이들은 밝다.
고아가 된 이후 주인공 자말은 형과 인도 전역을 떠돌며 온갖 고생을 다 한다.
비인도적이며 무법이 판치는 흡사 정글과 같은,
그 곳이 바로 '인도'.
극중 자말이 타지마할에 관광을 온 미국인 부부의 가이드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
그의 형과 일당들은 미국인 부부의 벤츠 승용차를 차체만 남겨놓고 모조리 뜯어가 버린다.
다른 인도인에게 너도 한패냐며 무자비하게 얻어맞던 어린 자말이 미국인 부부에게 소리친다.
"진짜 인도를 보고 싶으세요? 이게 바로 인도예요!"
아. 저 어린 소년의 자조라니.
근데 더 웃긴 건 미국인 아내의 다음 대사.
"그럼 우리가 진짜 미국을 보여주마."
이러면서 돈을 주는 거다.

인도의

상전벽해.



솔직히 영화의 스타일, 음악 등의 모든 요소는 마음에 든다.
역시 감독의 재기발랄함은 여전히 빛을 발하지만
그의 뒷통수치는 재기발랄함이 이 영화에서는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끝까지 도전을 거듭한 소년이 인도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것까지는 좋으나
.. 이 소년의 마지막 모습은 결국 패기와 불굴의 의지를 인도 빈민가 소년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할리우드의 흔해빠진 로맨스의 해피엔딩을 답습하는 것이었다니.
그리고 나서 난데없이 등장하는 발리우드식 뮤지컬의 재현은,
원래 엉뚱한 감독의 기질을 이해하는 바 재밌게 보고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이 영화가 아카데미를 휩쓸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심히 유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더군다나 대니 보일 감독이 인도를 식민지배했던 영국 출신이라는 것도 가볍게 보아넘겨지지 않는다.)
이건 인도의 참혹한 실상과 어두운 면을 고발하는,
그 와중에서도 피어난 희망과 도전이라는 단어를 담담하게(혹은 다소 유쾌하게?) 읊고자 했을 원작 소설의 자기고백적 서사를
그저 젊은이들 사랑놀음의 한바탕 쇼로 마무리지어버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건 영화에 엄청난 기대감을 심어주었던 영화의 오프닝을 완벽하게 배신하는 결말로서
남의 나라의 폐부를 진지하게 들쑤셔 놓고서 댄스 한판으로 웃으며 끝내는 무성의함으로 다가왔다.

시간의 흐름 방향은 다르지만 한 개인의 역사를 통해 나라의 근현대사가 다 들여다보이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생각에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박하사탕>을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할리우드의 오락영화 감독으로 이름 좀 나신 분이 (아니 일본을 예로 드는 게 낫겠다. 수오 마사유키 정도의 느낌?)
<토지>와 같은 소설을 가져다
한껏 요리해서 아주 멋진 작품으로 잘 만들어놓고 나서 구성진 탈춤 한판으로 마무리한다면?
물론 이 영화의 원작소설 <Q&A>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토지>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겠지만)
이 매끈하게 잘 빠진 영화, 진짜 인도를 보여주지만 결국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을 맺어버린 수미상응에 실패한 영화를
인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좀 씁쓸해 하지 않을까.
하긴, 워낙 태평하고 낙천적인 국민이라 어떻게 받아들일지 나는 잘 모르겠다만.
내가 인도 국민이었다면 심기가 꽤 불편할 텐데.
갑자기 궁금해지네.
일단 원작소설부터 한번 봐야겠다. ㅡ.ㅡ;
(일찍이 달인 선생이 '안 읽어봤으면 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대니 보일, 스타일은 개인적으로 정말 강추하지만
이 작품 좀 문제작인 듯.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hins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쿵쾅 2009/03/22 2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소설 보고 영화봤는데 소설의 주제의식이랄까...이런 건 방향이 마이 다른 듯...걍 오락영화같애...재밌게 보긴 했지만...ㅋ

    • Favicon of http://shinsee.tistory.com BlogIcon shinsee 2009/03/23 0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흠.. 아마도 그랬겠지.
      소설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거야.
      영화를 뭐라고 하고 싶진 않은데
      미국인들이 이런 영화에 열광한다는게 괜히 기분이 나쁘다는 ㅋㅋ

  2. 2009/03/27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Favicon of http://funcine.net BlogIcon 키아누 2009/03/27 1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뷰 잘 보고 갑니다^^*

  4. Favicon of http://yoon-o.tistory.com BlogIcon VISUS 2009/04/11 0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과 영화는 그 지향점이 다른 것 같더군요.
    트랙백 하나 남겨놓고 갑니다 ^^

    • Favicon of http://shinsee.tistory.com BlogIcon shinsee 2009/04/11 0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드시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드는 멋진 글이었습니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영화는 대니 보일 맘대로 만든 작품이었군요. ㅋ
      트랙백 감사합니다. ^^

  5. Favicon of http://photoshopfreedree.tistory.com BlogIcon 리키니쥬스 2009/04/12 2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셧군요. 저도 엔딩이 찝찝한게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거든요. 이건 마치 인도 배경의 현대 동화를 보는것 같더군요. 내용을 축약하니 "자밀은 이러저러한 역경을 딛고 로또 맞았단다"...라는..ㅡㅡ;
    개인적으로 마지막 퀴즈는 틀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해피엔딩을 보여주거나 퀴즈쇼가 아닌 다른 방법의 성공이어야 좀 더 깔끔한 엔딩이 되었을 텐데..

    • Favicon of http://shinsee.tistory.com BlogIcon shinsee 2009/04/12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영화 얘기 나올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자국영화 점유율이 50%를 넘는 인도영화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영국과 할리우드의 합공 작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는.. ㅋ
      그 작전, 꽤 성공한 것 같죠?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jamanwa BlogIcon 블로그아카데미 2009/10/10 1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댓글 활용법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예제 댓글 남깁니다^^*